언어의 정원, 상한 감정의 치유

어제는 2013년이 앞으로 100일 남은 날이었다고 한다. 이제 99일 남은 시점에서 돌아보건데, 필자에게 2013년은 기념 할 만하다. 그리고 오늘 새벽에 적는 이 리뷰도 제법 그러하다. <언어의 정원>으로 블로그에 복귀. 사실 요즘 핫한 <관상>도 개봉하자마자 봤으나 아쉽게도 영화 <관상>에 대해서는 전혀 운을 떼지 못했으니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 팩션(Fiction+Fact) 앞에만 서면 나도 모르게 우물쭈물 하는 건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사실 팩션 앞에서만 쩔쩔매는 건 아니었으니 이 작품이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작품이라는 사실도 영화를 다 보고 난 후에야 알았다. 더욱 안타까운 현실은 항상 '볼까말까 보고싶다 그런데 시간이 없네'라고 생각하던 애니메이션 <초속 5센티미터>가 감독의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벗꽃이 떨어지는 속도가 초속 5센티미터라며 감성을 자극하던 그 감독이 이제는 비 내리는 여름날의 감수성을 들고 뜨든 나타난 것. '봤으면 할말 많았을텐데'라는 아쉬움도 없지 않지만 아쉬움 보다 설레이는 마음으로 <언어의 정원>을 통해 소소하게 생각하게 된 세가지를 함께 공유해보겠다.

 

도심 속 정원, 언어의 정원이 가진 장소의 의미

 

 

정원은 집안에 있는 뜰이나 꽃밭을 의미한다. 하지만 영화는 거대한 도심의 공원 '신주쿠 공원'이 배경이다. 공원은 사전적 정의로 보나 단어가 주는 느낌으로 보나 정원을 포함하는 개념의 명사다. 그럼에도 영화가 '언어의 공원'이 아니라 <언어의 정원>이어야 하는 이유는 두 사람이 공공의 공간을 심리적으로나마 사적인 공간으로 소유하기 시작하면서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이다.

타카오가 유키노를 만나기 위해서는 실제적인 삶이 지속되는 공간인 도시에서 잠시 멈추거나 생각하게 하는 '정원'으로 가야한다. 여기 한가지 옵션이 추가되는데, 비다. 영화는 거대한 도시에서 커다란 공원으로 그리고 그 공원 안에 있는 정원으로 주인공을 끌어들임과 동시에 비라는 연출도구를 사용해 주인공과 관객들을 열린공간이면서 한정된 공간으로 끌어들여 몰입하게 한다. 몰입하고 몰두하게 할 뿐 아니라 도시의 팍팍함과 공원의 촉촉함 때문에 타카오가 공원에 가길 기대하게 하기도 한다. 동시에 그 둘이 만나기를 묘하게 기대하게 하는 심리변화까지 가져다 준다.

장면마다 표현되는 도시는 맑은 날에는 건조함으로 다가오고 비오는 날에는 눅눅하게 느껴지지만 주인공이 사랑에 빠지는 그 정원은 다르다. 맑은 날에는 한적하고 비오는 날에는 싱그럽다. 영화는 실내보다는 실외를 적극 활용, 대비되는 두 공간을 표현함으로 보는이에게 공원에 대한 그리움과 설레임을 갖게한다. 동시에 거대한 공원의 한 귀퉁이, 정원이라 부르고 싶은 둘만의 공간에 초대됨으로 관객은 유키노가 치유되는 과정에 함께 동참하게 된다.

 

상한 감정에 대한 묘사

 

 

대부분 이야기의 매력은 등장인물의 매력과 비례한다. 그런데 <언어의 정원>처럼 등장인물이 무미건조하게 다가오는 이야기란 참말로 오랜만이었다. 소년은 훈남이긴 하나 매력적이라고 부르기엔 2% 부족하다. 부재중 아빠, 12살 쯤 어린 남자친구와 살기위해 간헐적 출가 중인 엄마, 여기에 여자친구와 동거한다며 집나간 형이 타카오의 가족관계다. 가족관계에서 유추해 본다. 소년의 마음 한 구석은 항상 비어있을 것 같다. 결핍이라고 단정짓기는 애매하지만, 어딘지 입체감이 부족해 보이는 타카오의 성격이 애초 계획된 모습이었다면 엄청난 수확이다. 두드러진 성격도 아니고 주변에 사람이 많거나 호탕한 성격은 더더욱 아닌 그의 유일한 즐거움은 '구두'를 만드는 일. 러닝타임 46분 동안 그가 보여준 매력은 '구두' 만들기였다. 

<언어의 정원>에서 소년이 만나게 되는 여자 유키노는 처음에는 알아가고 싶은 여자로 등장하지만 뒤로 갈 수록 다 알게 된 여자가 되어버린다. 물음표에서 느낌표가 아니라 물음표에서 말줄임표로 끝나버린 여자. 여자는 원래는 건강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으나 학생들에게 이지메를 당하게 된다. 가르치는 학생에게 심각한 괴롭힘을 당한 여자는 결국 교직에서 잠시 물러나 있게 되고 매일 아침 용기를 내보았지만 결국은 아침마다 공원에 와서 앉아있게 된다. 영화는 여자의 상한 감정을 초코렛과 맥주로 표현한다. 유키노는 이지메의 충격으로 미각을 상실해 음식 중 유일하게 맛이 느껴지는 초코렛과 맥주를 매일같이 공원에 나와 먹게 되었다.

<언어의 정원>은 인물의 행동과 물건 혹은 어떤 매개체를 통해 조용하지만 사실적으로 상한감정을 표현해 낸다. 형까지 집을 비우게 되면서 조금 더 넓어진 집에서 구두 만드는 일에 열중하는 소년의 쓸쓸한 뒷 모습, 맛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맛이 느껴지는 맥주와 초코렛을 함께 먹는 여자의 표정을 통해 인물의 캐릭터에 집중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 그 자체를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상한 감정의 치유

 

 

비 오는 날에는 학교를 늦게 가기로 한 타카오는 유키노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둘의 만남이 쌓이게 되면서 신뢰가 형성되고 소년은 여자에게 구두를 선물하기로 한다. 소년에게 '구두'는 꿈이다. 여자에게 '구두'는상처에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용기를 대신한다. 꿈도 현실도 '하다'와 '가다'가 있어야만 하는데 둘에게 '구두'는 이 두가지 의미를 동시에 가진 물건이다.  

 

 

마음이 아프게 된 어떤 계기가 있었던 거처럼 상한 감정이 낫기 위해서 또한 어떤 계기가 필요하다. 유키노에게 그 계기는 '비오는 날'이었고, 소년이 만들어준 음식, 함께한 시간들이 마음을 낫게하는 역할을 튼실히 해주었다.

그리고 둘의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는 맑은 날, 각자의 시간을 보내는 두 사람의 일상을 통해 시간의 흐름이 우리에게 주는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타카오가 유키노에게 선물할 구두가 만들어지는 동안 아직 웅크리고 있는 그녀의 일상을 반복적으로 보여줌으로 두 사람이 처한 현실에 대해 이 둘을 따로 분리해 생각할 시간을 주기도 한다. 영화는 '그래서 다 나았다'라는 결과보다 낫기 위해 꼭 있어야하는 과정을 세밀하게 묘사한다.

 

“어차피 인간이란 모두 조금씩은 어딘가 이상한 생물이니까.”

 

사람은 다 그러하다는 그녀의 한 마디가 유키노 자신도 타카오도 인정해주는 말인 것 같아 마음이 편안하다. 그녀가 극도의 우울상태, 침울한 표정을 하지 않던 이유도 그녀를 괴롭힌 학생 또한 그러하다 생각해서 였을까. 그녀의 엄청난 우울과 상실감은 어쩌면 그녀가 '미각을 상실한 것'으로 대체되었을지도 모른다. 영화의 마지막은 비오는 날이 아니라 눈 오는 날로 '응..? 만나지 못했어?'라는 허망함을 남기고 끝나버리긴 했지만 (곧 만날 것 같기도 했지만 두 사람이 아직은 만난 것은 아니라서 만날지 아닐지 모르는 그런 상황, 이럴 때 괜히 초조한 건 내가 어딘가 이상한 생물이라서)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어차피 인간이란 모두 조금씩은 어딘가 이상한 생물이니까'라는 그녀의 대사를 사람-중심 상담의 칼로저스 선생님의 말을 빌려 정리해본다.  

 

 

더 이상 '당신이 나와 같기 때문에 나는 당신을 배려합니다'가 아니라 "당신이 나와 다르기 때문에 나는 당신을 존중하고 소중히 여깁니다"라는 것이 서로를 바라보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성향이 될 것이다.

 

 

 

 

덧, 이 글을 9월 24일 쓰기 시작. 그런데 9월 26일 오늘에서야 완성되었네요. 이건 다 제가 조금씩은 어딘가 이상한 생물이라서 그렇습니다. 덧의 요지는 이 글을 처음 보는 오늘은 2013년이 97일 남았다는 걸 알리기 위함입니다.

 

 

 

 

 

 


언어의 정원 (2013)

The Garden of Words 
7.5
감독
신카이 마코토
출연
이리노 미유, 하나자와 카나, 히라노 후미, 마에다 타케시, 테라사키 유카
정보
애니메이션, 로맨스/멜로 | 일본 | 46 분 | 2013-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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