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되었다, 양막파수 이후 26시간, 진통 20시간 그리고 제왕절개

출산준비물에 대해 끄적인 다음날, 양수가 터졌다. 8월 12일에 올린 포스팅인데 그 날 새벽까지 괜히 오버했나 싶었다. 11일부터 몸이 무척 피곤하고 조심스러웠는데 어쩌다보니 외출할 일이 생겨 꾸역꾸역 밖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일상의 기록/엄마사람으로 산다는 것] 막달의 불안감과 함께 챙겨보는 여름 출산가방

 

 

남편은 11일 학회 일정이 있어 미국으로 떠났다. 남편이 비행기에서 내리는 시간에 맞춰 연락을 받으려고 새벽까지 기다리다 새벽에는 배가 고파 잠이 안와서 무척 늦게 잠이 들었다. 일어나서는 잠이 부족한 상태에서 너무 신나게 통화를 했나보다. 워싱턴의 자전거 대여 환승 시스템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깔깔 거리고 웃는데 뜨끈한 물이 다리를 타고 흘렀다. 옆으로 누워 웃다가 당황해보기도 처음, 침대 시트를 다 적셨다. 전화를 끊고 병원에 갈 준비를 대충하기 시작했다. 무섭다라는 느낌보다 당황스러웠다.

 

병원은 집에서 걸어갈 정도로 가깝기 때문에 병원 가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양수만 터졌을 뿐 별다른 통증도 없었다. 인터넷에서 양수가 터졌다고 해서 씻으면 태아에게 감염위험이 있다는 소리를 어디서 들은 듯 해서 세수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병원으로 향했다. 접수 데스크로 가서 양수가 터졌다고 했다. 나만 마음이 급했나, 접수 받는 간호사는 별일 아닌 듯 분만실로 바로 올라가라고 했다.

 

우습게도 담당 주치의 선생님도 오프인 날이었다. 아는 얼굴을 만나면 그래도 안정이 되려나 싶었는데, 처음보는 사람이 와서 앞으로 분만을 어떻게 할지를 결정해줬다. 남편도 없고 담당 의사도 없는 뭔가 모든게 내 맘대로 되는게 없구나를 느끼는 순간. 처음 분만실에 누웠을 때는 촉진제를 투여하다가 나중에 의사분이 들어오시더니 유도하지 않고 자연진통을 기다려보겠다고 한다. 일단은 그리하기로 했다.

 

병원 안에 있는 모든 스탭들은 보호자를 애타게 찾기 시작했다. 여러 명의 간호사가 돌아가며 남편이 언제오냐고 물었다. 시어머니가 오시기로 해서 시어머니를 보호자로 하겠다 했는데 시아버지가 먼저 오신 건 함정. 남자는 남편 외에 들어올 수 없는 곳이라 병원에서는 시아버지를 밖에 우두커니 세워두기도 했나보다.

 

진통이 시작되기 전 시어머니가 오셨다. 동생도 와서, 진통이 걸리려면 시간이 제법 걸릴 것 같으니 밤 동안에는 동생과 함께 있고 다음 날 본격적으로 아플 때 시어머니와 있기로 했다. 어쨌든 그랬다. 자꾸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열심히 참았다. 울면 아기에게 더 좋지 않다는 말이 있어서 일단 참아보기로 했다.

 

12일 오후 12시 30분 쯤 양수가 터졌고 오후 1시 병원에 입원했다. 이후 5시간이 지나자 진통이 조금씩 오기 시작.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기 때문에 병원에서는 식사를 하라고 했다. 밥은 보호자가 나가서 사오는 것이라며 그래서 뼈 해장국을 먹었다. 열심히 먹었다. 병원은 역시 나를 통해 얼마를 벌기 위해 분만대기실 대실료를 친절하게 설명했다. 제대혈을 권유하는 아줌마도 그 정신없는 와중에 자꾸 찾아와 괴롭혔다. 일단 생각해보겠으니 나중에 보자고 했다.

 

저녁 이후 진통이 심해지기 시작했고, 새벽이 되니 강도가 더 세졌다. 끙끙하며 참는데 동생은 어느새 꿈나라로 떠나는 중이다. 동생을 깨워서 위층 병실에 올라가 편히 쉬라고 했다. 동생을 보내놓고 혼자 열심히 참았다. 잠을 자고 싶어도 아파서 잘 수가 없다. 몹시 피곤했다. 진통 중에 내진이라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처참했다. 간호사를 발로 차버리고 싶었지만 이성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병원에서 하라던 호흡법도 진통이 심해지니 하고 싶지 않아졌다. 그래도 새벽까지는 어떻게든 이어갔다. 새벽 4시쯤 되자 너무 아프고 텅 빈 분만 대기실이 외롭게 느껴지기 시작해서 위 층에서 자고 있는 동생에게 전화를 해서 내려와달라고 했다. 새벽부터는 심한 진통으로 먹은 것들과 남은 것들을 게워내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임신 시작부터 출산까지 생리적 현상과의 사투다.

 

이렇게 아픈데 남편이 못 본다는 사실이 ( ...) 사실을 ( ...)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미국에 가기 전부터 이미 스스로 예견하고 있던 일이라 진통 중에는 의외로 담담할 수 있었다. 느끼기에 3분 간격의 진통이었다. 어떻게든 참고 참아보니 아침이다.

 

집에서, 그리고 낮 동안에 양수를 모두 쏟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끊임없이 나왔다. 아기는 내려올 생각도 않고 위쪽에 동동 떠 있었고 그럼에도 진통은 점점 세지고 더욱 자주 찾아왔지만, 그토록 하기 싫은 내진이라는 것을 한 결과는 항상 2.5cm 혹은 3cm 열렸을 뿐이라는 것.

 

정말이지 죽을 것 같았다. 그래도 참았다. 오전 9시가 되었지만 별 진전은 없었다. 9시 부터 촉진제를 맞기 시작했다. 촉진제를 맞고 문이 얼른 열려 무통이라는 것을 맞는 시간이 오기만 기다렸다. 촉진제를 맞으며 오후 12시 까지 지켜보기로 했다. 죽을 힘을 다해 참았다. 사실 참는 것 밖에 방법이 없었다. 3교대로 간호사가 바뀔 때마다 보호자의 행방을 물었다. 지쳤다. 진통 중에 태동검사 한다고 한 자세로 누워 있게 하는 게 너무 힘들어 다 집어던지고 싶더라.

 

저녁 이후 진통이 시작되면서 부터 밤, 새벽, 아침이 되도록 허리로 진통이 오는 바람에 아픈 시간 내내 서 있었다. 다리는 점점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다. 다리가 네모 모양이다. 시어머니는 다리 부운 것을 신경써 주셨지만, 다리 부운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아침이 되니 잠이 쏟아지면서 진통도 1분 간격으로 오기 시작, 잠은 오는데 잘 수도 앉을 수도 일어날 수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기절할 노릇.

 

12시 쯤 됐을 때 내진 결과 2.5cm, 수술을 결정했다. 양수가 터지고 시간이 지체되기도 했고, 중간에 문이 열리다 닫히면 순산이 어려운 것도 뻔한 결과. 또 다른 복병은 13일이 길일이라는 사실이었다. 내가 제일 위급한 것 같은데 아이도 산모도 위험하지 않기 때문에 바로 수술을 들어갈 수 없고, 예약 산모부터 받겠단다.

 

오전 11시 30분 전후가 되자 이렇게 아프면 아이가 나오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땅이 빙빙 돌고 하늘이 노랗다는게 무슨 말인지 실감이 된다. 아기가 조금 내려왔다는 느낌과 엉덩이 두쪽 사이로 뭔가 낀 듯한 정말 어쩔 줄 모를 통증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아플 때마다 간호사들이 와서 호흡하라고 하는데 이제는 거의 자포자기 심정이더라. 그렇게 2시간 30분을 아프고 겨우 수술실에 들어가 마취를 받을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병원에 대한 정이 뚝뚝 떨어졌다. 

 

하반신 마취를 했다. 순식간에 진통이 사라졌다. 순간 제왕절개 꿀이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통이 워낙 심했던 터라 그 생각 외에는 별 생각이 없었다. 내 배에 어떤 과정들이 거쳐지는지 생생하게까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과정들을 알 수 있었다. 정신은 맑았다. 긴장하는 것 같아 보였는지 마취과 선생님이 재워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좀 자보기로 했다. 살짝 잠들었다가 정신이 들 때쯤 배에서 무언가를 꺼내고 후처치를 하는 듯한 손놀림이 느껴진다. 저 쪽에서 응애하는 아기가 닭똥 같은 눈물을 달고 나타났다. 살짝 볼을 맞닿게 해준다. 따뜻하고 보들보들하다. 신기하다. 아기와는 몇초 잠깐 마주할 수 밖에 없었다. 마취 중이니까.

 

회복실로 실려가는 중 병원 천장이 보였다. 이렇게 무력하게 천장을 보며 실려간 적이 없었다. 몸이 으슬으슬 했다. 회복실로 실려왔다. 순식간에 산모에서 환자가 된 기분이다. 자연분만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산모와 아기가 모두 건강하니 힘을 내서 아기를 낳으면 된다고 주치의 선생님이 늘 응원해 주셨는데 말이다. 그 응원을 생각하고, 미국에서 어쩔 줄 모르며 걱정하는 남편을 생각하며, 옆에서 지극정성으로 보살펴주는 시어머니와 동생의 힘을 받아 어떻게든 힘을 내봤지만 열심히 한다고 다 되는 일은 아니었다.

 

우리 아기 티끌이는 2015년 8월 13일 오후 2시, 38주 5일, 3.3kg, 48.8cm 건강하게 태어났다. 나는 그렇게 죽을 힘을 다해 엄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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