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미생으로 본 대상관계, 완생의 키워드 인간관계
- 심리학/심리심리 마음의소리
- 2014. 12. 26. 20:10
지난 주 드라마 <미생>이 종영했다. 웹툰은 일부만 보았고, 웹툰 보기를 쉬엄쉬엄 하던 중에 드라마가 시작되어 드라마를 먼저 보게 되었다. 드라마의 파급력 덕분에 원작은 또 다시 날개 돋힌 듯 (200만부가) 팔렸고, 심지어 등장인물 안영이의 오피스룩 마저 여성들의 사랑을 받고 있단다.
<미생> 신드롬 덕분에 대한민국 직장인들은 각자가 속한 직장에서의 생활과 자신을 돌아보고, 주부들은 남편의 고충을 이해하게 된다. 드라마를 보면서 필자 역시 나름의 자기성찰의 시간을 가져본다. 나 또한 장그래 같은 신입이 아니었고, 직장에는 당연히 오차장 같은 상사는 부재했다. 뭐랄까, 우리나라 대부분의 드라마가 장르와 종류에 상관없이 연애에 대한 판타지를 심어준다고 표현한다면 이것은 새로운 종류의 판타지다. 직장 판타지.
원작 윤태호 작가와 드라마 <미생> PD 김원석을 비롯한 배우들 덕분에 이 판타지는 현실감이 있는 드라마 <미생>으로 탄생할 수 있었다. 삶의 핵심과 문제 발생원인의 많은 부분이 인간관계에서 시작하는 것처럼, 직장생활의 시작도 끝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맺어진 관계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드라마이기도 했다. 드라마가 '관계'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1회 때 장그래(임시완 분)의 대사로 이미 짐작했다. 갑작스럽게 영업 3팀에 인턴으로 내던져진 장그래는 모두가 자리를 비운 자리에서 들이닥치는 전화로 곤욕을 치른다. 그는 안영이(강소라 분)를 졸졸 쫓으며 모든 전화업무를 부탁하고 모르는 것들을 묻게 된다. 상황이 진행되면서 그는 어린시절을 회상한다.
"오리는 태어나서 제일로 먼저 본 걸 엄마라고 생각한대요. 정말이에요?"
드라마 <미생>은 첫 회부터 관계를 맺는 과정을 절실하게 보여준다. 오랜기간 소속감을 느껴보지 못한 장그래의 독백을 통해 아침에 일어나 어딘가로 나갈 곳이 있다는 것, 이야기할 사람이 있고, 그 사람과 지속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주제가 있다는 것이 평범하다고는 하지만 결코 쉽게 주어지는 것만은 아니라는 현실을 알게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무대상(대상이 없는) 단계에서 삶을 시작한다. 그리고 양육자의 돌봄과 양육을 통해 '자기' 외에 대상이라는 것을 형성하고 알게된다. 대상관계 이론은 현재의 인간관계가 과거에 형성된 인간관계에 영향을 받는 이론으로 요약해 볼 수 있다. 단어 그대로 대상과 관계를 맺어가는 것을 '대상관계'라 한다. 대상과 관계를 맺는 것은 '자기', 조금 어렵게 표현하자면 '나'라는 사람과 관련된 표상이라 할 수 있다. 나와 관계를 맺는 대상은 정신적 표상일 수도, 실제 사람이나 사물일수도 있다.
장그래는 '나'라는 자기를 알게되었을 그 때부터 '바둑'이라는 대상과 관계를 맺어왔다. 그에게는 '바둑'이 정신적 표상이 되는 어떤 대상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가 아는 세상인 '바둑'을 통해 회사 생활을 바라보게 된다. 사람이라면 대부분이 그렇다. 각자의 영역 안에서 어떻게든 관계를 형성한다. 생애 초기 의미있는 대상으로부터 맺은 관계가 이후에 만나는 어떤 것들에도 꾸준히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삶을 살기 위한 첫걸음이다.
회를 거듭할수록 '바둑'이라는 세상은 회사생활에 적절하게 대입되며 장그래는 성장해간다. 신입 장그래가 성장하는데 든든한 버팀목이 되주는 상사 오상식 차장(이성민 분), 김동식 대리(김대명 분)가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장그래가 수도 없이 되뇌던 '우리'라는 관계가 되었기 때문이다.
“회사에 입사하면 좌절하든 오버하든 자아가 도출되기 마련인데 당신은 그런 게 없어. 무슨 일이든 한마디 불평 없는 장그래가 어떻게든 사회에 적응하려고 발버둥치는 출소한 장기수 같다" 김동식 대리가 장그래에게 한 말이다.
아기는 세상에 나와 엄마와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을 거쳐 자아가 형성된다. 회사라는 세계에서 자아를 형성하는 과정에 있던 장그래가 어쩌면 당연히 들어야 할 이야기였을지도 모른다. 다른 신입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과 맞지 않는 상황의 불합리함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있었던 걸 생각하면 너무 적절한 표현이다. 최고의 스펙을 가지고 입사한 장백기(강하늘 분)는 '기본'을 가르치려는 선배의 뜻과는 다른 '나'의 일을 하고 싶어 있는대로 불만을 표출하고 심지어 다른 회사로 이직을 하려는 고민을 한다. 한석율(변요한 분)은 선배의 불합리에 맞서 싸우기 위해 들이받기도 하고, 따지기도 하고, 심지어 사내 익명 게시판을 적극 활용하다가 망신을 당하기도 한다. 안영이(강소라 분)는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 팀내 분위기를 어떻게든 돌려보려는 생각에 스스로 봉사자가 되기를 자처하고 나름의 방법으로 회사 생활을 시도한다. 그러나 '자아'를 드러내지 않는 상태가 바로 그의 상태였다. 물론 19화, 20화에 들어서는 확연히 드러난 자아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말이다.
"살면서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질 수 있다. 파리 뒤를 쫓으면 변소 뒤를 어슬렁 거릴 것이고 꿀벌 뒤를 쫓으면 꽃밭을 함께 거닐게 된다잖아."
"그래서 저는 꽃밭을 걷고 있나 봅니다"
오상식 차장은 장그래에게 아버지 같은 차장님, 김동식 대리는 장그래에게 형 같은 선배였다. 우리는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꿀벌이 될 수도, 똥파리가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모두 미생이다. 그래서 완생으로 가기 위해 함께 가야 한다. 수도 없이 지나가는 많은 관계들 속에서 나에게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대상은 누구인지 혹은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좋겠다. 더 넓게 생각해본다면 나는 어떤 것에 빗대어 세상과 소통하고 있는지도. 그리고 새해에는 꿀벌 같은 선배가 될 수 있을지, 장그래 같은 진솔하고 진중한 관계를 만드는 사람이 될 수 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