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 나는 자유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장편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를 드디어 읽었다. 두툼한 문학작품을 몇 권이나 읽었는지 생각해보면 부끄럽게도 생각나는 작품을 한 두개도 내밀지 못한다. 읽은 책이 있어야 추천을 하지.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어떤 책이 좋았는지 이야기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읽기 시작했다.

 

20년 전 쯤에도 세계문학이라 불리는 책들을 읽기는 했었다. 읽다가 '이게 뭔말?'하면서 텍스트는 읽되 이해는 되지 않으나 나도 모르게 책을 읽었다는 항목에만 넣기 시작했던 때가 있었으니 기억으로는 그 시작을 열어준 책이 <폭풍의 언덕>이었다. 인간의 극한 감정, 사랑과 복수를 그린 격정의 드라마를 10살 쯤 된 아이가 이해하기는 무척 어려웠겠지. 

 

그런 의미에서 문학작품은 10대 때 (16살에서 19살 정도) 읽는다면 가장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10대 후반에는 감정적으로도 충만하지만 지성 또한 쑥쑥 자라날 시기기 때문. 그런데, 우리나라 10대들은 학교 아니면 학원에 앉아 이런 감정들에 대해 간접경험을 할 기회 없이 20대가 된다. 필자 또한 그랬기 때문에 20대를 훌쩍 지나려는 순간에서야 이렇게 찾아 읽기 시작한다. 그리고 느리지만 천천히 읽어보자는 목표로 펼친 처음 책이 <그리스인 조르바>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는 작가 자신의 자전적 소설이다. 그는 두 번이나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올랐지만 두 번 모두 다른 이에게 상을 양보해야만 했다. 추측하기로는 그가 그리스인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영국 문예 비평가 콜린 윌슨은 "카잔차키스가 그리스인이라는 것은 비극이다. 이름이 카잔초프스키였고, 러시아어로 작품을 썼더라면, 그는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을 것이다"라는 글을 썼다.

 

박웅현 작가의 <책은 도끼다>에서 여러번 강조된 것 처럼 워낙 예쁜 문장이 많아서 책을 읽으면서 한 문장을 읽고도 여러 번 감탄할 수 밖에 없는 문장들을 적어가면서 읽었다.

 

083 별이 빛났고 바다는 한숨을 쉬며 조개를 핥았고 반딧불은 아랫배에다 에로틱한 꼬마 등불을 켜고 있었다. 밤의 머리카락은 이슬로 축축했다.

 

문장이 무척 예쁘다고 느껴졌는데 <책은 도끼다>에서는 언어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표현한 예시로 소개하고 있었다. 다시보고 또 읽어도 놀랍다. 

 

책은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바다의 아름다움을 눈 앞에 있는 것처럼 섬세하게 표현한다. 특히 밤바다에 대한 사랑스러운 표현은 너무 달콤했다. 짠 바람이 부는 바다가 아니라 왜 그런지 모르게 달달한 바다가 느껴진다.

 

111 내 인생은 한갓 낭비에 지나지 않는다. 걸레를 찾아 내가 배운것, 보고 들은 것을 깡그리 지우고 조르바라는 학교에 들어가 저 위대한 진짜 알파벳을 배울 수 있다면 ...

 

카잔차키스는 조르바를 1917년에 만났다고 한다. 그는 전쟁으로 석탄 연료가 부족해지자 기오르고스 조르바라는 일꾼을 고용해 펠로폰네소스에서 갈탄을 캐려고 시도했다. <그리스인 조르바>에 나오는 '나' 처럼 당시 그는 34살이었다. 조르바는 입이 거칠지만 하는 말 마다 모두 지당하신 말씀이었다. 그는 삶으로 삶을 배우고 나는 책으로 삶을 배운다. 소설에서의 나는 신에게 가까이 가고 싶으나 아직은 멀었고, 조르바는 인간의 본성에 철저히 승복하므로 순리를 따른다.

 

인문학이 위험할 수도 있는 이유 중 하나가 나는 '신 없이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을 심어주기도 하기 때문이라 생각하는데 소설에서도 조르바를 통해 비슷한 모양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굵직한 소설을 단 한번 읽고 이 책이 철저한 인본주의라고 단정짓기는 어려워 글을 아끼기는 하지만 어떤 대목에서는 지극히 그러하다. 

 

204 죽기전에 되도록 많은 땅과 바다를 보고 촉감하고 싶었다.
211 인간이란 게 도대체 무엇이며 왜 이놈의 세상에 태어났으며 인간이란 얼마나 좋은 것인가 따위를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그리스인 조르바>는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경외와 죽어가는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떠올리게 한다. 생명의 본체와 생명이 소멸하는 과정, 그리고 그 안에서 하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들을 돌아보게 한다. 삶과 죽음에 대한 언급만큼 영혼에 대한 언급도 많고 육체를 입고 있는 인간이 당연히 마주해야 할 벌레의 존재에 대해서도 바라보게 한다.

 

 


 

두 사람의 사업은 결국 망하게 된다. 그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이야기 속 '나'는 자유를 외친다. 책을 보는 내내 조바심이 났다. 엄청난 노력을 들인 이것이 망하면 어쩌나, 그래도 성공하지는 않으려나 하는 마음으로 책을 보았다. 그런데 모든 것들을 날리고 '자유'를 외치다니, 함께 후련하기도 했지만 완전 자유롭지도 못했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으며 마지막으로 친 밑줄이 이런 나의 머릿속 생각을 조르바의 입담으로 잘근잘근 짚어준다.

 

429 인간의 머리란 식료품 상점과 같은 거예요. 계속 계산합니다. 얼마를 지불했고 얼마를 벌었으니까 이익은 얼마고 손해는 얼마다! 머리는 좀상스러운 가게 주인이지요.

 

 

 

그리스인 조르바(1947), 니코스 카잔차키스, 열린책들, 이윤기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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