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망생 일기, 04. 다단계의 추억 (다단계 경험담)
- 일상의참견
- 2014. 12. 24. 00:02
보름도 남지 않았다. 20대라는 파릇한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 시간. 오늘 적고자 하는 끄적임은 20대에 몇 개 안되는 자랑스러운 기억의 일부다.
자랑스러운 이유는 하나는 주제파악을 했기 때문이요, 둘은 현실을 정확하게 보았기 때문이다. 다단계의 함정에 빠지는 이유는 돈을 벌 것만 같은 욕심에 눈이 멀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될 것 같아서 하다가 나중에는 친구도 잃고 돈도 잃는다.
나에게는 다단계와 동거한 3일의 추억이 있다. 어쩌다보니 합숙하는 곳에 끌려가 3일을 먹고자고 했으니 아주 진하게 체험하고, 그들의 신념을 징하게 들었다. 블로그를 열심히 하던 2011년 다단계에 대해 몇가지 적었다.
최근에는 친구가 아는 동생이 다단계를 하려 하는데, 다시 봐도 답이 없는 불법 다단계라서 말리려 하다가 오히려 욕을 들었다는 해괴망측한 소식을 들었다. 다단계 합숙소에 다녀온지 1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속고 속이고 여전히 당하는 사람이 있다니, 법이라는게 참 허술하다. 아무리 둘러봐도 다단계로 성공해서 보란듯이 사는 사람을 만난적이 없다. 오직 그들은 그 회사 안에만 존재할 뿐이다.
때는 대학교 3학년 한참 유학에 관심이 있었다. 그 때는 싸이월드의 파워가 좀 있을 때라 기억에 싸이월드에 있는 '유학을 가고 싶은 사람들의 모임' 비슷한 이름의 클럽에 가입했다. 어느날 해당 클럽에 가입되어 있는 어떤 분이 나에게 매우 친절하게 일촌을 걸고, 방명록에 다녀간다는 기록을 남기곤 했다. 그래서 그런가보다 했다. 몇 번 답방을 오가다가 전화번호를 알려달라 하길래 허물없이 알려줬다. 일단 그 어떤 분은 여자였고, 그냥 친한 언니 동생 하려나 싶어 별 생각없이 관계가 지속되는 것을 받아들였다.
어느날 그녀는 나에게 여행을 가자고 했고, 나는 이번에도 역시 긴 고민 없이 오케이 했다. 지금의 나라면 전혀 오케이하지 않을 상황인데, 어린 시절의 나는 제법 호기롭고 겁이 없었다. 여행을 2박 3일 가자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여행이 가고 싶긴 했지만 굳이 그 사람이랑 갔어야 했나 하는 의문이 남는다. 난 참말로 친구가 없는 사람이었나보다.
어쨌든 당일이 되었고, 여행은 시작되었다. 서울 근교, 경기도에 있는 시골 어디쯤 가자던 그녀는 나에게 '잠실'에서 만나자 했던 것 같은데 잠실에서 날 보더니 대뜸 "토탈 마케팅을 하시는 분이 있는데, 그 분을 꼭 너에게 소개시켜 주고 싶다. 그러니 잠깐만 뵙고 여행을 가자"고 했다. 여기서 이상한걸 눈치챘어야 똑똑이인데, 헛똑똑 109를 보유하고 있는 나는 그런가? 뭐지? 싶어 따라갔다는 이야기.
우리의 시골 여행은 갑자기 분당 여행으로 변했고, 기억에 분당선을 타고 지하철에서 내려서 어느 평범한 길들을 가다가 어느 건물에 들어갔던 것 같다. 그냥 그녀가 말하는 '그 분'의 사무실인것 같아 역시 의심하지 않고 쫄쫄 따라간다.
응 (... ) 들어갔더니 지옥이었다. 내부는 나름 깨끗하고 산뜻하게 정리되어 있었는데 그 안에는 다단계의 꼬임에 빠진 정체불명의 대학생들, 지방에서 상경한 청년들 등등이 포진해 있었다. 들어가서는 그들 중 두명인가에게 갑자기 상담 비슷한 것을 받은 기억이 나고, 다단계와 관련된 강의를 들었다. 어떤 것이 먼저였는지는 모르지만, 요지는 그들은 나를 집요하게 설득하려 했고 나는 그들에게 뭔 개소리냐며 되묻기를 반복했다는 거다. 강의를 듣고 일대다 상담을 받고의 반복이었다.
강의 내용은 팀장급 어쩌구 높은 직책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강단에 서서 뭉뚱그려서 설명을 해준다. 피라미드를 옆으로 그리면서 프로슈머를 아느냐 이제는 소비자가 판매자가 되는 세상이다라며 주구장창 설명을 한다. 가끔은 서울대 나왔다는 대장급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강단에 서서 나의 열등감을 자극하는 말들을 하기도 했다. '그 대학 나와서 뭐할래?' 같은 학벌 열등감을 자극한다거나 뭐 등등이다.
이런 강의들이 끝나면 다시 일대다 상담의 시작이다. H대를 휴학하고 CPA를 준비하다가 이 사업을 시작했다는 사람, 나와 같은 학교인데 컴퓨터공학을 전공하고 지금은 휴학 중인데 이 사업으로 돈을 벌고 있다는 사람 등이 접근해 상담아닌 상담을 한다.
처음에는 "이게 다단계죠. 뭐가 달라요."라며 하나하나 대꾸해주고 싸우기를 반복. 하다하다 지쳐서 나중에는 동조하는 척하는 걸로 방향을 전환했다. 그들은 너무 많았고, 화장실에 갈 때도 감시하고 문자도 전화도 모두 감시했다. 좋은 사업이라고 하면서 부모님께 알리지 말라고 했다. 왜 좋은걸 부모님한테 말하지 말아야하나. 인터넷에도 찾아보지 말라고 했다. 어쨌든 나는 한명이고, 그들은 다수였다. 이참에 이런 세계가 있구나를 체험하기로 했다.
아직도 기억나는데 식사를 늘 거하게 사줬다. 조마루 뼈다귀 감자탕이 생각난다. 감자탕집은 프랜차이즈라 간혹 지나가다 보일 때면 제일 먼저 '다단계'라는 단어가 생각난다. 2박 3일의 끼니 중 뼈다귀 감자탕 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항상 배불리 맛있는 식사를 먹었다. 물론 기억에는 감자탕 뿐이지만.
잠은 모텔에서 재워줬다. 그 여자의 무리들과 함께 잤다. 좁지 않은 방이었는데, 총 네명이 한 방에서 생활했다. 침대는 손님이자 곧 호갱님이 될 예정인 내 차지. 어쨌든 그랬다. 첫날 이후 맘 껏 먹고, 다단계 이야기 듣다가 잘 자고, 집에나 가자고 마음을 굳힌 나에게 더 이상 문제될 것은 없었다.
2박 3일의 마지막 날, 나는 그 여자의 상사인듯한 H대를 휴학하고 CPA 한다는 사람에게 마지막 세뇌교육을 받고 집으로 갈 수 있었다. 나는 '그렇군요'를 반복하며 속으로는 '너네도 빨랑 집에 좀 가라'고 궁시렁거렸다. 그 여자와 무리들은 나를 우리 동네까지 버스로 친절하게 모셔다줬다. (생각해보면, 택시도 아니고 버스로) 내가 사는 동네를 알려준다는 것이 내심 찜찜했지만 극구 사양하는 나를 그들은 끝까지 친절하게 모셨다.
집으로 와서는 제일 먼저 업체를 인터넷으로 검색해봤고, 안티 피라미드라는 사이트에 들어가 사람들이 올려놓은 정보와 다단계에 빠진 사람들의 피해 후기를 살펴봤다. 그리고 바로 전화했다. 3일 동안 꾹 눌러 참았던 말을 드디어 할 수 있었다.
"안 해요. 너나 실컷 하세요"
아주 속이 후련했다. 다단계 업체는 망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단체가 이름을 바꿔서 다른 단체로 탈바꿈을 한다. 다시 다른 사냥감을 찾는다. 그런 그들의 꼬임에 넘어가는 이유는 그들이 엄청난 이론과 전략으로 무장해서가 아니다. 그저 당신의 욕심 때문이다.
불이 모두 꺼진 방에서 여자의 무리 중 한 명이 말했다. "어릴적 부모님과 행복했어요. 밤이면 옥상에 가서 별도 보고 그랬죠. 저는요, 제가 꼭 이 사업 성공해서 돈 많이 벌어서 우리 가족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취업도 어렵고, 돈은 벌고 싶은 어느 여자의 이야기.
땀 흘린 만큼의 가치를 노동의 대가로 환산했을 때, 현실적인 계산과 다른 높은 수입의 노동이라면 -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면 된다'를 부르짖으며 뛰어들었다면 그건 이미 자기 욕심의 시작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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