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망생 일기, 02. 결국은 스스로 고민하게 되는 진로

 지망생 일기, 02. 결국은 스스로 고민하게 되는 진로

 

아들러는 출생순서와 가족 구성원, 부모의 양육태도가 한 사람의 성격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대부분의 이론에 공감하듯 아들러의 가족과 관련된 이론에도 마찬가지로 크게 공감한다.

 

구태여 아들러라는 거창한 이름까지 들먹이며 가족 구성원이나 부모의 양육태도를 이야기 하는 이유는 첫째로 태어나 내 뜻과 상관없이 많은 부분 부모님의 요구에 부응하며 살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나에게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고, 어린 나에게 생존의 요구조건 중 하나가 부모님 마음에 드는 것이었다. 지금은 부모님의 요구에 전혀 부응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적어도 원망이나 불평은 없지만, 어린시절 나는 그러했다. 

 

어려서부터 나에게 기대되던 부응의 의무란 부모님 말씀을 잘 듣는 것, 공부 잘해서 좋은 성적을 받는 것, 집안 일을 해 놓는 것과 같은 작은 성취목표는 물론이거니와 진로에 대한 부분도 마찬가지였다.

 

진로 (進路) [질ː로] [명사] 앞으로 나아갈 길

 

'진로'하면 20대에 들어서서 본격적으로 함께하게 된 초록병에 담긴 투명액체(지금은 끊었다)가 먼저 떠오르는 건 나 뿐만이 아니라는 확신을 뒤로 하고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해 적어본다.

 

아마 초등학교 때는 기억에 '외교관'이 되겠다며 위풍당당 했던 것 같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배우기 시작한 영어가 화근이었다. 영어를 잘하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라고 생각하고 난 뒤의 결론이었으리라. 물론, 세상 물정을 몰랐기 때문에 꿀 수 있었던 거대한 꿈이기도 했다. 고학년에 진입하면서 나름대로 성적이 잘 나온다는 근거없는 자부심에 '의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의사'라는 직업이 가진 고귀한 직업정신도 멋있어 보였겠지. 

 

그 이후에도 자라면서 되고 싶은 것, 하고 싶은 일은 수시로 바뀌기도 하고 유지되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줄곧 생각해온 한 가지는 이 다음에 글을 써야겠다는 막연함이었다.

 

고등학교에 와서 슬슬 나의 현실과 마주하게 되더라. 우스겟소리지만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서울대, 연, 고대 밖에 모르지만 (일명 SKY) 2학년이 되면 서울 안에 있는 대학들을 알게되고, 고3이 되서야 우리나라에 이렇게 많은 대학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는 이야기도 있다. 진담보다 더 사실같은 이 농담은 나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됐다.

 

집안 환경이 어려워지니 부모님의 관심은 '나'에서 '가족이 살아가는 것' 자체로 바뀌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공부보다는 놀기에 치중했다. 생각있고 개념있는 척하나 전혀 생각없는 청소년으로 지내던 나는 다음 수순으로 최악의 수능성적표를 맞이하게 된다.

 

공부를 아주 안했던 것도 아니고, 적당히 해서 적당한 대학에 가겠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교만이었다. 나름의 꿈이 있었는데 (역시나 멋있어 보이는 것 위주) 광고홍보학을 전공해서 광고 기획자가 된다던가, (혹은 카피라이터) 친구들이 나에게 고민상담을 하는데 이야기 들어주는 게 어찌나 즐겁던지 주제 넘게 상담사가 되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최악의 수능성적표를 맞이하게 된 나는 전공에 대한 결정권을 결국 부모님께 넘긴다. 생각하기 싫어하던 청소년의 최후였다. 성적표를 들여다보고 지원 가능한 대학을 확인하면서 사회복지 쪽으로 진지하게 고민을 해봤는데 (아무래도 상담과 같은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으니까, 광고홍보학은 이미 오르지 못할 산) 부모님의 은근한 반대로 건축을 전공하게 된다. '자신을 위해 사는 것도 멋진 일이라'며 한 번 해보지 않겠니라는 권유로 수능 보기 2주 전에 수학포기자의 길을 선택한 필자는 건축공학과 철근 콘크리트와 구조역학이라는 무시무시한 역학의 세계로 진입하게 된다.

 

건축을 공부한 경험은 나에게 아주 멋지고 소중한 시간을 선물해 준다. 분명 잘못된 선택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때는 몰랐다. 아무도 나에게 묻지 않았다. 왜 하고 싶은지, 그 일을 하면 앞으로 어떤 길을 가게 되는지, 그 일을 하면 재미있을 것 같은지와 같은 아주 소소한 것조차 묻는 사람이 없었다. 아무도 묻지 않는 길을 누군가의 권유로 혹은 그저 수능 커트라인에 맞춰서 선택해야 했다. 스스로 생각해보고 선택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해주는 어른은 없었다.

 

그리고 개념없는 청소년이던 나도 별다른 고민은 하지 않았다.

 

 

(지망생 일기, "03. 결국은 스스로 고민하게 되는 진로 (하)"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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