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아이 키우는 엄마들에 대한 존경, feat. 아들러의 출생순위와 성격

 

 

<미움 받을 용기>로 우리나라에서 대중의 사랑을 받게 된 아들러, 아들러의 이론 중 흥미롭기도 하고 그럴 듯도 하고 꼭 이럴 것도 같긴 하지만 임상사례로 정확하게 검증할 수 없어 현재는 그저 이론일 뿐인 연구가 있다. 출생순위에 관한 연구다. 형제 여럿이 있을 때 첫째냐 둘째냐 셋째냐 혹은 막내거나 외동이거나로 어떤 특성을 갖는지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아들러식 심리치료에서는 초기기억과 가족 구성에 대한 탐색과정이 꼭 필요하기 때문에 중요한 이론이기는 하다. 하지만 개개인의 생활양식, 부모의 성격, 아이의 기질에 따라 출생 순서가 같더라도 서로 다른 성격이 형성되기 때문에 정형화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학계의 분위기. 어쩌면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만 통한다는 ABO 혈액형과 관련된 심리와 성격에 관한 내용들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사족이지만 혈액형과 심리, 성격은 전혀 관계가 없다.

 

 

첫째 아이 일반적으로 많은 관심, 동생이 태어나기 전까지 관심의 대상, 응석받이로 자란다. 의존적이고 열심히 일하며 앞에 나서려고 한다. 동생이 태어난 후 더 이상 독특하거나 특별하지 않다. 첫째는 새로운 인물이 '자신이 누리고 있던 사랑'을 훔쳐갔다고 믿을 수도 있다고.

 

둘째 아이 첫째와는 입장이 다르다. 태어날 때부터 관심을 형제와 나누어가졌다. 경쟁 속에 있는 것처럼 행동, 항상 압박을 받는 상태다. 일종의 형이나 누나를 이기기 위한 훈련 상태라 볼 수 있다. 둘째는 대부분 첫째와 대립한다.


가운데 아이 압박감을 느낀다. 삶은 불공정하다고 느끼거나 속았다는 느낌을 가진 수 있다. '형편없는 나'라는 태도를 가질 수 있으며 문제아가 될 수도 있지만, 갈등이 많은 가족에서는 중간 아이가 상황을 결합시키는 조정자 혹은 평화의 사도가 될 수도 있다. 한 가족에 아이가 4명이라면 둘째 아이는 흔히 중간 아이처럼 느낄 수 있고, 셋째는 더 유순하며 사교적이고 첫째와 같은 편이 될 수 있다.


막내 아이 언제나 가족의 어린애로 많은 관심을 받는다. 막내는 자신의 길을 가는 경향이 있다. 가족들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흔히 행동한다.


독자(독녀) 나름대로 문제를 가진다. 맏이의 특징(높은 성취동기)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형제들과 나누거나 협동하는 것을 배우지 못할 수 있다. 어른들을 대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잘할 수 있다. 부모에게 의존적으로 매여 있을 수 있다. 항상 무대 중앙에 있기를 바라고 자신의 위치가 도전을 받으면 이를 불공정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심리상담과 치료의 이론과 실제, Gerald Corey



읽어보면 알겠지만 그런 면도 있고 아닌 면도 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셋째, 넷째까지 적용해 볼 일이 거의 없다. 대학원 수업시간에 서로 형제와 출생순위에 대해 이야기해 봤는데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더라. (요즘 아이들은 적용해보기 어렵겠지만 나이가 지긋한 선생님들 중에는 적용 가능하기도)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하다가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고 표어까지 써 붙이는 인구정책은 효과가 있었다. 그렇게 지내며 넋 놓고 있다 보니 어느덧 인구절벽을 마주하게 된 우리나라. 이제는 낳아라, 낳아라 야단이다.

 

유년시절 형제가 셋 있는 집이 드물었는데, (그때는 정책이 그랬다지만) 요즘은 외동으로 자라는 아이들이 많더라. 딸 소담이가 유치원을 가거나 학교를 갈 때가 되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크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아이를 키우는데 엄청난 수고가 드는데다 월급이 물가를 따라잡지 못하니 제 아무리 국가에서 양육을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한들 빠듯함은 여전할 테니.


게다가 우리나라는 아빠가 육아에 참여하는 것이 어려운 기업문화가 뿌리내리고 있다.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도 종종 셋을 키우는 엄마들을 본다.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아기와 함께 지내다 보니 아이가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 가기 전 최소 2,3년은 내 시간이 없다는 게 무슨 말인지 알겠더라. 그래서 셋 이상 키우는 엄마의 위대함 앞에서는 나도 모르게 겸손해지고, 하나 낳아 소중하게 키우는 엄마들의 마음도 충분히 공감한다.


하나도 괜찮지 않을까?
결혼을 하고 소담이를 낳기 전까지 은연중에 했던 생각이다. 임신과 출산 육아로 이어지는 과정이 순탄치 않다는 사실은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너무 당연한 사실이었으니까. 형제가 많은 아이들이 복작복작 하면서 자라는 모습이 너무 예쁘고 보기 좋기도 했지만 항상 우선이었으면 하고 바라는 '내 인생'을 살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둘 이상 자녀가 있는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이 아이를 하나만 낳으면 엄마가 평생 친구가 되어줄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100% 동의하긴 했지만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생각, 무엇보다 자신이 없어서였다.


선생님, 집에 가기 싫어요.
상담 대학원을 준비하면서 아르바이트로 영어 유치원 보조일을 했다. 아이들을 돌봐주거나 차량에 탑승해 유치원 등하원을 돕는 일이 주로 하는 일이었다. 유치원이라 하더라도 요즘 아이들은 참 빠르다. 모두 말을 잘 하더라. 유독 애정이 가는 두 아이가 있었는데, 재키와 엘리였다. (가명을 쓰고 싶으니 아이들 영어 이름을 쓴다) 제법 말이 잘 통하기 때문에 애정이 갔을지도 모르는데 아들러의 출생순위에 대한 이론으로 생각해 본다면 외동으로 자라는 아이들은 어른과 대하는 법을 형제와 많은 시간 지내는 아이들에 비해 먼저 알게 되기 때문이랄까.

 

어쨌든 그 둘과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기억 속에 아이들은 집에 갈 때가 되면 항상 시무룩했다. 어쩌다 엄마와의 외출이 예정되어 있거나 친구들과 만나 놀 일이 있는 날이면 표정이 다르긴 했다. 재키는 집에 도착할 때 쯤이면 입을 삐죽거린다. "집에 가기 싫어?"하면, "네... 너무 심심해요.", "선생님, 집에 가기 싫어요."했다. 엘리는 집 앞에 와서는 엄마 얘기를 한다. "그래도 엄마가 잘 놀아주지?"하면, "잘 놀아주긴요, (미간을 찌푸리며) 맨날 혼자 인터넷 해요. 저는 그냥 티비 보거나 혼자 놀고요."한다.

 

둘은 있어야겠구나
그때부터다. 스스로 자연스럽게 설득이 된다. 형제 있는 아이들이 집에 갈 때 부럽다는 듯 쳐다보는 눈빛에 마음이 찡했다. 집에 가기 싫다면서 울먹이는 아이의 얼굴에 묻어나는 근심을 보면서 괜히 안쓰럽다. 주말에 가까운 근교라도 놀러 갔다 온 월요일이면 신이 나서 이야기하지만 집에서 놀던 주말을 보낸 월요일에는 유독 더 시무룩했던 아이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형제 있는 아이들은 주말에 동생이랑 싸운 얘기, 뭐 먹은 얘기라도 하던데 재키는 그랬다.


아직도 자신이 없다
그런데 아직도 자신은 없다. 낳아봤더니 쌍코피가 안 났을 뿐이지 쌍코피 터질 것 같다. 감기몸살을 앓고 있고 관절마다 두드러기가 났다. 기저귀 값이 무섭고 정성 들여 재웠더니 슬며시 눈을 뜨는 아이의 해맑은 얼굴도 무섭다. 자다가도 기저귀 갈고 수유하고 무슨 정신인지 모르겠고, 하나 더 낳는다면 이걸 한 번 더 해야 한다는 사실도 자신이 없다. 그래도 어찌어찌 살아가며, '내 인생'에 아이 인생 함께 넣어서 같이 걷는다 생각하며 '내 인생'만 외치는 게 아닌 함께 가는 인생에 대해 고민하는 중이다. 

 

그런데 만약 둘로는 사회성이 어떻고 성격이 어떻고 하는 교육학과 심리학 이론이 있고, 아이들이 형제 둘로는 무척 외로워한다더라 하는 이야기들이 도처에 널려있고, 실제로 그렇다고 하더라도 셋은 안 되겠다. 남편에게 종종 말한다. "나 두 번 까지는 어떻게 해볼지 몰라도, 애 셋 낳으면 가루가 돼버릴지도 몰라."

 

그래서 오늘도 모든 엄마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참고서적>
심리상담과 치료의 이론과 실제, 제럴드 코리, 2012

이미지 출처: http://morguefile.com/archive

 

 

 

-

이 글은 브런치에 먼저 발행된 글입니다 : )

브런치에서 다른 이야기들도 만나보세요*  https://brunch.co.kr/@soulfoodish

 

 

 

반응형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