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페이, 어딜가도 열정페이, 높은 물가를 따라가기에 너무 낮은 시급
- 일상의참견
- 2015. 7. 30. 21:30
나이 서른이면 골드미스 정도 되어 있을 줄 알았다. 현실은 그냥 아줌마. 그냥 아줌마. 경단녀라고 하기에는 경력이라 할만한 게 없는, 어떻게 결혼은 했구나 싶은 아줌마다.
열정페이라는 말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착취 당하는 청년들의 상황이 구체적으로 담긴 기사들을 많이 접하게 된다. 10년 전에는 열정페이라는 단어는 없었다. 그래도 최소한의 인간다움을 누리고자 아르바이트를 구할 때면 최저시급을 꼭 지키는 곳에만 이력서를 넣고 면접을 봤다. 노동의 가치를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는 곳에서 일을 하는 것이 필자와 고용자 서로 존중을 하고 받을 것이라는 생각도 있었다.
[어느 알바의 필담] 어느 알바의 필담, 01. 연봉을 알려주마
블로그에 [어느 알바의 필담]을 차곡차곡 쌓아갔는데, 임신을 하게되니 더욱 다양한 알바를 할 수 없게되어 쉬는 중이다. 어쩌면 다시 쓰기 어려울지도 모르지. 첫 번째 글인 연봉을 알려주마에서는 경험해 본 직군들의 연봉과 급여에 대해 약간씩 나열을 해뒀다. 알바의 필담에서도 마찬가지로 물가상승률을 시급이 쫓아가지 못하기 때문에 열심히 일해도 허덕일 수 밖에 없다고 적어뒀는데 2년 후인 지금도 여전하다.
최저임금 협상이 여러번 결렬된 끝에 2016년 최저임금은 6030원으로 결정되었다. 근로자 입장에서 봤을 때 여전히 적다. 사용자측에서는 당연히 반길리 없다. 단 10원이 오르더라도 반갑지 않을 것이다. 사용자는 적게 주는 것이 좋고 근로자는 많이 받는 것이 좋은 게 당연하다. 그러나 냉정하게 따져보면 최저임금 조차 맞춰줄 수 없는 사업장에서는 사람을 고용하지 않는 것이 맞다. 근로자도 마찬가지로 노동의 대가를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업장에는 일을 하겠다며 발을 들이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최저임금은 올해 하반기 들어 지속적으로 뜨거운 감자다. 임금에 대한 문제가 지속적으로 뜨거우니 열정페이도 지속적으로 회자될 수 밖에 없다. 최저임금은 물가상승률에 맞춰 적절하게 미리 올라 있어야 했다. 감히 추측해보자면 국가와 기업은 서로 짝꿍이 맞아 임금을 올릴 생각은 없고 물가는 꾸준히 올렸겠지라는 생각이다. 생활비를 위해 '여전히' 아르바이트를 조금씩 하는 입장에서 말하자면 사용자 입장에서도 알바를 잘 만나야 하는 것처럼 알바도 고용주를 잘 골라야 한다. 과거에는 꾸준히 설계직에 머물기 위해 어느 정도의 열정페이를 감안하고 일을 했었다. 한 때 웅성웅성 시끄러웠던 이상봉 디자이너의 열정착취에서도 알 수 있듯, 우리나라에서 예술과 아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곳에서 '열정페이'라는 것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관행이다.
건축 설계회사에 다닐 때 4대보험을 내고 통장에 들어오는 돈은 130만원 정도, 그나마 야근수당을 적립해서 받을 수 있던 곳이라 다행인 곳이었다. 130만원을 받고 일주일에 세 번 집에 들어가는 것 조차 황송해하며 매일 같이 야근을 하고 그렇게 6개월을 버티다가 너무 지쳐버렸다. 동시에 몸도 급속도로 쇠약해졌다. 그래서 그만뒀다. 이후로 회사를 알아볼 때 관심을 두게 된 부분은 더 이상 꿈과 열정이 아니었다. 나에게 회사에서 일하는 시간 외에 여유시간을 주거나(말하자면 칼퇴), 혹은 급여로 보상이 되는지 여부가 더 중요했다. 당시 130만원으로 나름대로 돈을 모으기도 하면서 생활할 수 있었던 이유는 주거 문제가 해결됐기 때문인데, 부모님과 같이 살던 때라 집이 수도권에 있어서 출퇴근이 가능했다. 아마 2012년 쯤이었다. 그 무렵 쯤 이다. 나름 인지도 있다는 패션디자인 회사에서 근무하는 지인에게 급여를 물어봤다. 야근 수당 없이 130만원. 참 각박하다.
그런데, 이 정도는 양반이다. 졸업 후 바로 취직 자리를 알아볼 때 일이다. 여기저기 작은회사, 큰 회사 가리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기준으로 이력서를 넣었다. 면접을 보게 된 회사는 작은 어린이 공연 기획사였다. 이 때 까지만 해도 꿈이 야무져서 무대미술로 유학을 가고 싶어했다. 그래서 착실하게 경험을 쌓으면서 이 일로 돈도 벌고 유학을 가야지라는 야무진 꿈을 갖고 있었다고. 하지만 이런 계획은 해리포터급 판타지라는 사실을 곧 알게 되었다. 급여가 적을 것이라는 예상은 했었다. 때는 2010년, 조심스럽게 급여를 묻는 나에게 사장님이 말씀하셨다. 80만원. 80만원. 80만원.
아마 그 때 가정형편이 조금 여유 있었다면 몇 개월이라도 일을 했을지도 모른다. 때마침 집안 경제가 엉망이라 발을 들여보지도 못하고 그렇게 고이 접어뒀다. 아무래도 집안 형편을 돌봐야 할지도 몰라서다.
그 이후 일단은 욕심보다는 현실에 맞춰 건축과 관련된 다른 일들을 했다. 그리고 몇년 후 그냥 아줌마가 되긴 했지만, 그래도 조금 다른 아줌마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교육대학원을 다니게 된다. (물론 지금은 장기 휴학중이긴 하지만) 상담심리와 관련된 일을 하기 위한 재교육 과정으로 다니게 되었는데, 여기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모든 교육과정을 이수하지도 않았고 상담심리사 자격증은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지만 중간중간 구인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으면 뒷목이 뻐근하다. 급여 지급에 있어서 제일 먼저 본을 보여야 하는 국가기관에서 조차 열정페이를 요구한다.
구인공고의 지원 자격요건은 이러하다. 상담심리 등 관련 석사이상, 상담심리사 자격 2급 이상, 9시에서 6시 근무, 잔업 있음, 그러나 잔업 수당은 없음. 급여 120만원. 엄청난 스펙, 공부를 많이한 상담자를 원하는 기관에서 제시하는 급여는 120만원이다.
아르바이트로 생활을 메꾸기 시작하면서 시급을 따라 일을 하면 된다고 생각을 해 왔다. 오히려 아직은 알바하기 적절한 나이와 나름대로 대졸자, 회사를 꾸준히 다닌 이력 덕분에 열심히 찾다보면 괜찮은 일이 제법 있기도 했다. 2012년 이후 아르바이트로만 생활하면서 나에게 주어진 시급은 항상 7000원 이상이었다. (이 정도면 알바로 일하면서 충분하지, 시간대비 효율도 좋다) 회사를 그만두고 알바라는 이름으로 지내온 3년 동안 하고 싶은 공부를 하기 위한 나름의 차선책이었다. 그런데 '자아실현'의 기능도 함께 되어야 한다는 '직업'을 구하는데 있어서는 앞으로도 내면에서 물질과 열정에 대한 가치가 부단히 치고 박고를 반복해야 할 듯 하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열정만큼의 급여 받기, 아니 딱 일한 만큼의 급여 받기, 죽기 전에 가능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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